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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재(巖齋)

창녕이씨 암재공파(昌寧李氏 巖齋公派)

34.9x68.3x6.1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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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암재(巖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4.9x68.3x6.1
  • 건물명 암재(巖齋)
  • 공간명 창녕이씨 암재공파(昌寧李氏 巖齋公派)
  • 서예가
  • 위치정보 포항시 남구 장기면 신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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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재(巖齋)

암재(巖齋)


암재(巖齋)는 암재(巖齋) 이운기(李運基, 1847~1912)가 자식 교육을 위해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신계리에 건립한 서실의 편액이다. 집 뒤에 바위[巖]가 있어서 그렇게 명명하였고, 또 이를 취하여 자신의 호로 삼았다. 이운기는 「계자戒子」에서 “내 나이 이미 육십에 가까우니 구하는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다. 그러나 구하는 것은 오직 아이를 가르쳐 성취시키고자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수년간 노력하여 서실을 창건하고 암재라고 편액을 달았다.”라고 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획이 굵고 묵직한 해서체이다.

근육질의 남성미가 연상된다. 붓을 깊이 사용하여 두툼하고 튼실한 필획을 구사하였다. 기필 부분의 다소 정제되지 않고 과장된 듯 강하게 시작한 형태는 울퉁불퉁하여 역동적이고, 수필의 마무리 부분에서 경쾌한 처리는 율동감을 더해준다. 글자 내부의 배치도 각박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한지에 먹을 듬뿍 담아낸 붓질이 자유자재인 가운데 절제되어 뒷맛이 개운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창녕이씨 암재공파(昌寧李氏 巖齋公派) 소개


창녕이씨(昌寧李氏) 암재공파는 고려 충선왕 때 과거에 급제하고 예의판서를 지낸 후 창산군에 봉해진 이정현(李正賢)의 후손이다. 이정현의 현손 이귀춘(李貴春)은 여말에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고 포항 장기현 학삼에 은거하여 입향조가 되었다. 이후 조선에 들어와서는 이대임(李大任, 1574~1635)이 현달하였다. 이대임의 자는 사중(士重), 호는 죽계(竹溪),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부친은 참의를 지낸 국추(國樞)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방경(徐方慶), 서극인(徐克仁), 이눌(李訥)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장기향교의 오성팔현(五聖八賢)의 위패를 석굴에 피난 봉안하였고, 장기와 경주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사후에 병조참판에 증직되었고, 학삼서원에 배향되었다. 그의 9대손이 암재 이운기이다. 그의 자는 덕현(德賢), 호는 암재(巖齋), 본관은 창녕이다. 괴재(槐齋) 이인환(李寅煥)과 덕계(德溪) 이정일(李貞一)에게 수학하였고, 1897년 자식 교육을 위해 암재를 지어 학문 수양을 하였다. 또 낙성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사람들과 주고받은 시들을 모아 『암재창수록巖齋唱酬錄』을 만들었다.

참고문헌
  • 『안동시사』, 안동시사편찬위원회, 1999.
  • <이대임>,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김윤규, 「『암재창수록巖齋唱酬錄』에 나타난 19세기말 지방 인사들의 한시 창수문화」, 『동방한문학』 62, 동방한문학회, 2015.